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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황씨 이야기

- 41 -한국황씨중앙종친회의 숙제한국에 살고 있는 황씨들이 황락공의 후손이 아니라고 한다고 해서 한국황씨가 아니다 라고 하면 않된다.

출처: 이북나라 전자책 『창원황씨 이야기』 3쪽 · 12쪽 · 18쪽 · 26쪽 · 35쪽 · 41쪽

전체 42쪽 · 온라인 플립북

본문에서 살펴볼 내용

본문 3쪽

- 3 -황씨의 역사황씨는 중국고대의 전설 삼황오제부터 시작한다고 하고 황제로부터 시작하여 전욱고양의 후손이며 6대손 육종이 황씨의 시조라고 하고 있다.나는 이 것을 부정 한다. 육종은 25명의 자식을 낳았고 육종의 25명 자식들에게서 14개의 姓 씨가 생겼다는 것이다.그럼 육종은 황씨의 시조가 아니다.육종에게는 둘째 아들 혜련공이 계셨는데 이분은 풍수지리 지리학에 능하신 분이다. 고대는 항상 홍수로 인한 피해가 엄청났다. 홍수를 잘막는 사람이 왕이 되고 영웅이된다.혜련공은 중국 요나라시대 요임금의 신하였다. 홍수를 잘막아서 치수의 공을 높이 치하하면 姓을 황씨요 이름을 운(云) 이라 지어 주고 중국 산서성 태원시에 땅을 하사하고그곳에 나라를 세워주고 黃國이라 했다는 기록이 있다.이것이 황씨의 시작이다. 즉 황운공은 세계 모든 황씨의 시조인 것이다.이 기록은 황씨가 중국 사람이라는 것이라는 것이다.

출처: 이 전자책 3쪽

본문 12쪽

- 12 -龜山洞, 龜旨峰, 黃山河양산 黃山津함안거북산, 구포리,龜谷,구림들,구곡저수지. 龜頭谷,구성리 元龜城, 南龜부산구포동, 구봉산이를 근거로 황경수 공의 일행은 마산 창원지역으로 내려왔고 그 후손들이 황씨 집성촌을 여기저기 만들어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이 지역에는 骨浦國 또는 彌烏野馬國이란 나라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삼국유사 물계자전에 기록하고 있고, 서기 209년에 포상팔국 전쟁에 골포국이 포함되었다, 아라가야인 함안과 전쟁을 했다. 212년에 골포국을 포함한 몇 나라가 신라의 울산을 공격하는 전쟁이 있었다는기록을 하고 . 삼국지위지동이전에는 포상팔국이 승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골포국은 황씨의 나라였다는 것이다,거북 龜 자와 황씨와의 관계는 거북이 모양에서 누를 黃 자가 그려졌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고, 중국 바이두를 검색하면 황씨를 검색하면 바로 거북이 형상이 검색된다는 것을 알수 있게 한다.

출처: 이 전자책 12쪽

본문 18쪽

- 18 -지형상에서 동산위에 있는 골포국 황씨들이 유리하였다.나무뒤에 숨어서 활을 쏘아대니 흉노족들은 많은 피해를 입었다. 이에 흉노족들은 산에다가 불을 질러서 골포국 병사들을 산 아래로 내려오게 하여 전투를 벌이려고골포국 병산들에게 산에게 내려와서 싸우지고 하면서구지가 군가를 만들어서 떠들었다. 龜何龜何 거북아 거북아首其現也 머리를 내놓아라若不現也 만일 내놓지 않는다면燔灼而喫也 구워서 먹으리황씨들아 황씨들아 머리를 내 놓아라만일 내놓지 않으면구워서 먹으리나무숲에 숨어 있는 황씨들을 자극하는 노래다.황씨의 토템이 거북이라는 것을 알기에 흉노족들은 그렇게 노래를 부르며 황씨들을 자극했다.그래고 산에다 구비봉에다가 불을 질렀다.나무가 불에 타자 연기가 봉루리로 올라왔고 골포국 병사들은 전의를 상실하고 산에서 내려와서 흉노족들에게항복을 했다.

출처: 이 전자책 18쪽

본문 26쪽

- 26 -개성 시대이를 바탕으로 4세 휘 영렬께서는 개성으로 올라가서 응양군소속 무관이 되셨던 것이다. 그리고 거처를 개성으로 옮겼다.무관이셨기에 무관들과는 아시는 분이 많앗을 것이다.그중 의창공씨인 공유 孔楡 장군을 알게되셨다고 본다.공유장군은 고려가 몽골의 침입을 받았을때 몽고와 끝까지 항쟁하는 삼별초부대가 있었는데 고려조정으로 부터 삼별초를 토벌하라고 명을 받은 장군이다. 그러나 삼별초의 토벌은 쉽지 않았다. 장군의 가문 공천기의 여식과 5세 휘 유께서 혼사를 맺은 것이다.우리가문은 의안군을 떠나 개성에 올라와서 개성의 중앙관직에 있는 가문과 최초로 혼사가 이루워진 것이다.그리고 5세 휘 유께서 출생하신다.휘 유께서는 1308년에 과거시험을 보아서 급제하여 그 사실이 등재되었으나 그해 충렬왕이 붕어하고 원나라와 고려 사이에는 상당히 복잡한 정치 상황이어서 과거에 급제한 사람을 관리로 등용를 시키지 못하였다. 5세조 휘 유께서는 아들을 진신, 진백을 두시고 최유안에게 출가한 따님과 권적에게 출가한 따님을 두셨다.이중 막내딸은 권적의 계실로 출가를 하였다.권적 안동권씨 호는 계정 으로 길창군이고 시호 원정이다. 충혜왕의 심복이었다.

출처: 이 전자책 26쪽

본문 35쪽

- 35 -용헌공께서는 1526년 부터 족보를 쓰시기 시작했다. 3세 대상공의 여러자식중에 직계 선조인 휘 영렬과 그후손만을 기록한 족보를 기록하셨다. 4세조의 관직과 5세조, 6세조, 7세조의 역사는 봉례공께서 7세조의 기록을 보면서 기록해 두신 것이라고 본다. 이유는 할머니의 친정을 자세히 기록할 수 있었던 것은 어떤 기록이 전해져 왔기 때문에 가첩에 자세히 써 둘 수 있었다. 1527년 1월 용헌공께서는 가첩을 완성 하셨다. 우리는 그 족보를 볼 수가 없지만 그 족보는 가첩수준의 내용이 부실한 족보 였을 것이라고 생각된다.이유는 생몰연대가 기록되어 있지 않은 것이 많기 때문이다.이로서 우리는 창원황씨로서 족보를 가지고 살아왔다. 그런데 1607년에 발간된 족보에서 정익공께서 쓰신 발문을 통하여 알수 있는 것은 대상공으로부터 넝쿨 줄기가 무성히 퍼져 나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송강공이 지으신 9세조 봉례공 묘갈명에 3세 대상공게서 원조遠祖 라고 기록하신 점에서 대상공을 시조라고 생각하여 언제 부터인가 대상공파 라고 하여왔다. 그리고 대상이란 직책을 종2품 금자관록대부라고 표현한 기록들이 그 이후에 나온다. 과대포장을 한 것이다.

출처: 이 전자책 35쪽

본문 41쪽

- 41 -한국황씨중앙종친회의 숙제한국에 살고 있는 황씨들이 황락공의 후손이 아니라고 한다고 해서 한국황씨가 아니다 라고 하면 않된다. 한국에 사는 모든 황씨들은 한국중앙종친회의 회원이 될 수 있는 것이다.한국중앙종친회장 황경노씨가 평해 월송정에 9개 관향의위패와 비석을 세워두게 했다. 장소가 비좁아 모든 본관의 황씨들의 비석을 세워 둘 수가 없었가 때문이다.비석이 세워져 있는 황씨들은 매년 평해에 2차례 시향을 지내러 가고 있다. 비석과 위패가 없는 없는 황시들은 평해엘 가지 않는다.이것은 한국황씨의 통합이 아니다. 한국중앙종친회에서는 부지를 구입하여 한국의 모든 황씨들의 비석을 세워야 한다.한국황씨의 인구는 697,171명이고 본관의 숫자는 230개이다. 기타 인구가 4,157명이나 본관이 얼마나 더 많은지 모르겠다.임진왜란때 조상을 잊은 사람들 6,25때 조상을 잊은 사람들이 본관을 막 만들어 냈다. 인구가 100명도 않되는곳이 부지기 수이다. 최소한 인구가 100명 이상되는33개의 본관의 황씨들을 한곳으로 모여서 축제를 벌이기 위해서는 황씨들의 성지를 만들어야 한다.평해에 가지 못하는 황씨들은 얼마나 소외되겠는가?

출처: 이 전자책 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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